“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나온 이 대사는 20년이 지나서도 인기다. 상대방과 헤어지기 싫어 더 같이 있자 말 못 하고 라면을 먹고 가란 ‘플러팅’(호감을 표현하는 말)은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이 명대사를 탄생시킨 허진호 감독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 섬세한 연출로 정평이 난 ‘멜로 장인’이다.
10월은 허 감독의 달이 됐다. 극장에선 그가 연출한 영화 ‘보통의 가족’이 관객과 만나고, 안방에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 ‘대도시의 사랑법’(3~4회)이 공개됐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이 그가 익숙하게 선보여온 멜로영화가 아닌 스릴러, (퀴어)로맨스 드라마라는 점이 흥미롭다. 환갑에 영화 인생 새 챕터를 연 그를 아시아경제가 만났다.
“남윤수 눈빛이 개연성…사랑에 빠진 표정에 놀라” ‘대도시의 사랑법’은 대도시 서울에 사는 청춘 남성 고영(남윤수 분)이 다양한 만남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는 로맨스다. 2부씩 총 8부작을 네 명의 감독이 연출했다. 이 중 3-4부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편을 허 감독이 연출했다. 암 투병 중인 엄마와 철학 강좌에서 만난 띠동갑 애인 영수에게서 느낀 사랑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현실에 발붙인 멜로와 가족 관계가 감독의 초기작을 연상시킨다.
같은 주인공을 두고 챕터별로 연출을 나눠 맡아 시리즈를 완성하는 작업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통용되던 방식. 한국영화아카데미 동문회가 아카데미 4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프로젝트로 기획하면서 가능한 작업이었다. 1~2화 ‘미애’ 손태겸(29기), 허진호(9기), 5~6화 ‘대도시의 사랑법’ 홍지영(14기), 7~8화 ‘늦은 우기의 바캉스’ 김세인(34기) 감독이 차례로 연출을 맡았다. 허 감독은 “원래 ‘미애’를 맡고 싶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책을 읽고 좋아서 연출을 맡았다”고 했다. 남성 간 로맨스를 그린 작품 연출은 처음이다. 그는 “이성, 동성 간의 사랑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며 “보편적인 우리 삶의 이야기, 인간과 인간의 로맨스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2019년 발간된 박상영 작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화했다. 박 작가가 극본도 썼다. 각각 2부작 분량을 찍느라 촬영은 20회차 남짓 진행됐다. 허 감독은 “촬영 기간이 한 달 정도로 길지 않았다”며 “드라마(인간실격)를 작업해본 경험이 있어서 제작 과정을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원작자이자 극본을 쓴 박 작가와의 소통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원작자인 박 작가와 이야기를 긴히 나눴다. 숨은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에선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디테일을 물어가며 작업했다”고 말했다.
청소년 관람불가인 ‘대도시의 사랑법’ 수위는 높은 편이다. 주인공 고영이 연애하는 과정에서 키스신, 베드신이 나오는 만큼 동성 간 애정 표현이 서슴없이 그려진다. 허 감독은 “현장에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며 보고 들으며 찾아가는, 평소 작업 방식대로 찍었다. 영화 한 편을 찍는다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남윤수에 대해 “존경스럽다”고 했다. 그는 “배역 섭외 과정에서 남윤수가 하겠다고 해서 놀랐고, 좋았다. 현장에서도 열정적이었다. 스킨십 장면도 민망함 없이 배우로서 잘 소화했다”고 말했다. 또 “눈빛이 개연성이었다. 단순한 식사 장면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과 애정이 가득했다. 진짜로 상대를 좋아하나 싶을 정도였다. 모니터를 보며 ‘아 저거구나, 됐다’ 싶었다”고 했다.
필름→디지털→OTT…변화의 파도에 맞서는 거장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OTT가 대세가 되며 극장 분위기가 바뀌었다. 허 감독은 1997년 데뷔해 26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팬데믹 기간 JTBC 드라마 ‘인간실격’(2021)을 찍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특기인 ‘멜로’를 벗어나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에 눈을 돌렸다. 아들의 범죄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를 본 부모들의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영화 ‘보통의 가족’ 작업도 그에게 새로운 자양분이 됐다. 허 감독은 “멜로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다루는 작품이라 흥미로웠다”며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느끼게 됐다”고 했다.
지난 16일 개봉한 ‘보통의 가족’을 본 평단과 실 관람객 반응이 좋았지만, 한주 사이 누적 36만명을 모았다. 배우 설경구, 장동건 등이 출연하는 데다 거장의 이름값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다. 허 감독은 “극장에 관객이 많지 않아 아쉽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최근 극장 분위기가 전과 달라 긴 호흡으로 영화를 즐긴다고 들었다. 관객과의 대화(GV)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최근 배우 정우성, 송중기 등이 ‘보통의 가족’ GV(관객과의 대화) 진행자로 나서 힘을 보탰다. 정우성과는 영화 ‘호우시절’(2009)을 함께한 인연이 있다. 허 감독은 “정우성에게 특별히 고맙다”고 했다. 그는 “GV를 진행하려면 최소 두 번 이상 영화를 봐야 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질문을 직접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우성도 그랬다. 바쁜 시기에 특별히 작품을 위해 와서 영화를 위해 힘을 보태줬다. 모처럼 같이 이야기도 많이 나눴는데, 고마운 마음을 잊지 못할 듯하다”고 했다.
허 감독은 이달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을 닳도록 누볐다. 두 편의 작품 공개 시기가 맞물려 부르는 곳이 특히 많았다. 영화제 기간 만난 일본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에게 영감을 줬다고 했다. 40년 넘게 영화를 만들었지만, 열정과 도전 의식이 남다른 그의 철학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다. 그는 “앞으로 다양한 이야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 촬영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큰 변화를 겪은 세대다. 당시 중국에서는 병행되던 과도기가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최근 OTT로 대세가 넘어가는 흐름이나 극장 침체를 바라보며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우려와 기대가 든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달라질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